늦가을 햇살 품은 경주 덕봉정사의 고요한 정취
늦은 오후 햇살이 기와 위로 부드럽게 스며들던 날, 경주 마동의 덕봉정사를 찾았습니다. 마을과 들판이 맞닿은 언덕 위에 자리한 정사는 크지 않았지만, 단정한 지붕선과 목재의 결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며 처마 끝 풍경이 은은한 소리를 냈고, 주변의 감나무 가지에는 주황빛 열매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마당에 들어서자 흙냄새와 나무향이 어우러져 고요한 공기가 감돌았습니다. 덕봉정사는 겉보기엔 소박하지만, 그 속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유와 절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마루에 앉으니, 바람이 천천히 스쳐 지나가며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하는 듯했습니다.
1. 마을과 산 사이에 놓인 접근길
덕봉정사는 경주시 마동 마을 외곽의 낮은 언덕 위에 자리합니다. 내비게이션을 ‘덕봉정사’로 입력하면 마을길을 따라 완만한 도로가 이어지며, 정사 바로 아래에 소형 주차장이 있습니다. 차량에서 내리면 정사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보이고, 길 양옆에는 소나무와 억새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입구에는 ‘德峯精舍’라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렸고, 주변의 들판에서는 볏짚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습니다. 언덕 위로 오르자 지붕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마을을 내려다보는 정사의 위치가 왜 탁월한지 단번에 느껴졌습니다. 조용하고 정제된 공간이었습니다.
2. 정사의 구조와 첫인상
덕봉정사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단층 목조 건물로, 팔작지붕 아래 나무 기둥들이 가지런히 서 있습니다. 마루는 사방이 트여 있어 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기둥마다 세월이 만든 색이 깊게 배어 있었습니다. 내부에는 단출한 책상과 탁자, 고서가 몇 권 놓여 있었는데, 당시 선비들이 글을 읽고 묵향을 즐기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정사 뒤편에는 작은 연못과 돌탑이 있어 풍경에 고요함을 더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마루로 흩날렸고, 그 소리가 정사의 적막함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절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였습니다.
3. 덕봉정사의 역사와 정신
덕봉정사는 조선 중기 학자 덕봉 이의립(李義立) 선생이 학문과 수양을 위해 지은 정사입니다. 그의 호를 따서 ‘덕봉정사’라 이름 붙였으며, 이후 후학들이 찾아와 글을 익히고 토론을 나누던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안내문에는 이곳이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마음을 닦고 예를 배우는 공간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덕봉 선생은 청렴하고 절제된 인품으로 알려져 있었고, 정사 주변에는 제자들이 남긴 시문비가 남아 있습니다. 건물 옆에는 그가 직접 심었다는 소나무 한 그루가 여전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 마치 그의 정신이 지금도 이 자리에 머무는 듯했습니다. 학문과 겸손, 그리고 고요한 사유의 전통이 깃든 장소였습니다.
4. 관리와 주변 풍경의 조화
정사 주변은 마을 주민들과 문화재 관리소의 손길로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자갈이 고르게 깔려 있었고, 나무 울타리가 공간을 부드럽게 감쌌습니다. 마루 앞에는 작은 석등이 세워져 있었으며, 햇빛을 받아 은은한 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정사 뒤편에는 오솔길이 이어져 있어 천천히 걸으며 산책하기 좋았습니다. 벤치와 음수대, 안내판이 마련되어 있었고, 화장실도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햇살이 정사의 기둥을 따라 길게 드리워졌고, 그 그림자가 마당의 자갈 위에 부드럽게 떨어졌습니다. 공간 전체가 조용하고 단정했습니다. 세심하게 다듬어진 풍경 속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움이 돋보였습니다.
5. 함께 둘러볼 만한 경주 주변 명소
덕봉정사를 둘러본 뒤에는 차량으로 15분 거리에 있는 ‘경주 양동마을’을 추천합니다. 조선시대 전통 가옥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정사의 역사적 맥락과 함께 살펴보면 좋습니다. 또한 가까운 ‘옥산서원’에서는 당시의 유교 교육 공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점심은 마동 근처 ‘덕봉가든’에서 먹은 산채비빔밥이 기억에 남습니다. 직접 재배한 나물이 가득 들어가 신선한 향이 입안에 퍼졌습니다. 오후에는 경주의 ‘경주국립박물관’을 방문해 신라와 조선의 문화유산을 함께 감상했습니다. 덕봉정사–양동마을–옥산서원으로 이어지는 하루 일정은 조선의 학문 정신을 느끼기에 이상적인 코스였습니다.
6. 방문 팁과 추천 시간대
덕봉정사는 상시 개방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없습니다. 오전 10시에서 오후 4시 사이가 관람하기 가장 좋으며, 이 시간대에는 햇살이 정사 내부까지 은은하게 스며듭니다. 봄에는 벚꽃이 담장을 따라 피어나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붕 위를 붉게 물들입니다. 여름에는 벌레가 많으므로 밝은색 옷차림과 모자를 준비하는 것이 좋고, 겨울에는 언덕길이 미끄러울 수 있어 주의해야 합니다. 마루에 오를 때는 신발을 벗는 예의를 지켜야 하며, 내부의 물건을 손대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평일 오전에는 방문객이 거의 없어 정사의 고요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비 온 뒤에는 나무 향이 짙어져, 오히려 더 깊은 분위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마무리
덕봉정사는 화려하지 않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과 품격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공간이었습니다. 마루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면, 조선 선비들이 추구했던 절제와 사색의 의미가 자연스레 느껴졌습니다. 나무의 결, 기와의 곡선, 바람의 흐름—all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처럼 다가왔습니다. 소란한 도시와 달리 이곳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생각이 가라앉는 자리였습니다. 잠시 머물렀을 뿐인데 마음이 정리되고, 조용한 울림이 남았습니다. 다음에는 봄 햇살이 따뜻한 날 다시 찾아, 꽃잎이 흩날리는 마당에서 천천히 머물고 싶습니다. 덕봉정사는 경주의 역사 속에서도 가장 고요하고 깊은 숨결을 간직한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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